[서명]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 감옥의 역사

[지은이] Michel Foucault

[옮긴이] 오생근

[출판사] (주)나남

[판본] 20080105 재판 8쇄

[ISBN] 9788930032483

[책가격] 20,000원

[구입일] 20110906

[읽은기간] 20140813 ~ 20141010


<밑줄>


45page

중죄와 경범죄라고 하는 명칭에 의해서 항상 사람들은 형법전이 규정하는 법률적 객체를 재판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정념, 본능, 비정상, 불구, 부적응, 환경 혹은 유전의 영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59page

어쩌면 권력이 광인을 만든다거나 거꾸로 권력을 버리는 것이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의 하나라는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 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의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69page

형벌로서의 신체형은 신체에 대한 마구잡이식 처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분화한 고통을 창출해내는 일이며, 형벌의 희생자들을 낙인찍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의식이지,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잊고 무절제하게 표현되는 사법권력의 분노는 아닌 것이다. 신체형의 극단성에는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모든 논리가 담겨있다.


120page

추리문학의 탄생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앞에서의 전단만이 아니다. 투박한 범죄자의 영광과 신체형에 의한 어두운 영웅시의 풍조가 사라진 것이다. 민중적 인간이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미묘한 진실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 이 새로운 문학양식에서는 이미 민중적 영웅도, 대규모적인 처형도 존재하지 않으며, 거기서 인간은 악한이지만 영리한 존재이다.


135page

형벌제도에 관한 새로운 법이론은 처벌권의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혁'이 왜 단일한 출발점을 갖고 있지 않게 되었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144page

형벌의 개혁은 군주의 초권력에 대항하는 싸움과 실행되고 묵인된 위법행위를 일삼는 하층 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의 접합점에서 태어난 것이다. 또한 그 개혁이 임기응변적인 경우에 생긴 일시적인 성과로 그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초권력과 하위권력 사이에 모든 관계망이 잘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150page

이제 법은 '자연본성에서 벗어나는' 인간을 '인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으로 되는데, 그것의 동기는 범죄자의 내면에 깊숙이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초래하는 여러 결과들에 대한 필연적인 조절에 기인한다. 이 '경제적' 합리성이야말로 형벌의 척도가 되고, 그것의 정비된 기술을 규정하게 하는 근거이다. '인간성'이란 이러한 경제성과 그것에 의한 면밀한 계산에 부여된 명칭이다.

 

166page

어리석은 전제군주는 노예들을 쇠사슬로 구석할지 모르지만, 참된 정치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관념의 사슬로 노예들을 구속한다. 정치가가 사슬의 한쪽 끝을 붙잡아 두는 것은 이성이라는 고정된 측면이다. 또한 그 사실은 우리가 그 구조를 모르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단단히 조여드는 것이다. (J. M. Servan, "Discours sur l'administration de la Justice Criminelle 범죄사법행정에 관한 논설", 35면)


206page

범법행위에 대처하는 데 전혀 다른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사회계약상의 법적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과, 그 어떤 권력의 일반적이며 동시에 세부적인 모든 형식에 순응하는 복종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216page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바로 규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17page

경제적 착취가 노동력과 노동생산물을 분리한다면, 규율에 의한 강제력은 증가되는 소질과 확대되는 지배 사이의 구속관계를 신체를 통해 확립해 두는 것이다.


219page

건축에 대한 안목만 있어서는 안 된다. 돌을 깍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le marchal de saxe).


234page

일람표의 작성은 18세기 과학·정치·경제의 기술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그것은 식물원이나 동물원을 정비하고, 동시에 생물체의 합리적 분류체계를 세우고, 상품과 화폐의 유통을 관찰하고, 통제하고, 조정하며 그것을 통하여 부(富)의 원리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경제표를 만드는 일이다.


 

243page

전통적 형태의 시간표를 지탱하던 원리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나태를 불허하는 원칙이었다. 즉, 신에 의해서 계산되고 인간에 의해 지불되는 시간의 낭비는 금지되었고, 시간표는 도덕적 과오이며 경제적 불성실이라 할 수 있는 낭비의 위험을 막아야 했다. 한편 규율은 긍정적 관리를 그 목표로 삼으로 적극적 경제 시간의, 이론상으로 항상 증대되어 가는, 이용의 원리를 세운다. 즉, 시간을 사용하기보다 완전히 소비시켜 버리는 것이다. 


279page

규율·훈련의 위계질서화된 감시를 통해 권력은, 하나의 물건으로서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소유물로서 양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장치처럼 작용한다. 또한 그 권력의 피라미드형의 조직이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장치의 전체구조가 '권력'을 만들어내고, 영속적이고 연속된 영역 안에서 개개인을 분류해 두는 것이다. 그 결과, 규율 중심적 권력은 완전히 공개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은밀한 것일 수도 있다.


420page

법이 만인의 이름으로 만인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위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법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다른 일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다.

 

435page

범죄사건으로 채워진 사회면 기사는 매일같이 장황한 필치를 통해, 사회를 분할하여 감시하는 사법과 경찰 차원의 통제책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그 전쟁에서 경종 또는 승리에 관한 일지를 만든다.

 


<후기>


이 책이 유명한 책이고, 식자들이 필독을 권하는 책이긴 해도 솔직히 잘 이해하지도 못한 주제에 "나 이런 어려운 책도 읽었다" 라는 식으로 자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솔직히 이 책의 본문내용 절반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저녁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이 서울대권장도서 100선에 선정되어 있는 것에 어이가 없다. 대학생들에게는 권장도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서울대권장도서 목록의 파급력은 대학생이 아니라 대입수험생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서울대 논술시험 대비랍시고 이 책을 고등학생들에게 필독서라고 추천하는 어처구니 없는 글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글을 쓴 사람은 과연 이 책을 읽어나 보았을까?

하긴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도 고등학생을 위한 권장도서에 끼워 놨던데, 세상에나 "순수법학"을 몇 명이나 읽어 봤다고 권장도서란 말인가? "순수법학"은 한국어번역판이 2000년인가에 출간되었고, 그나마도 절판된지 최소 5년은 넘었고, 법학전공자들도 몇 년을 제대로 공부해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내용이다. 이 정도라면 제대로 읽지도 않고 어디서 주워 들은 유명한 책이라는 이유로 권장도서랍시고 적어 놓은 게 분명하다. 

심지어는 W. Blackstone의 영국법주해를 예비대학생을 위한 추천도서라면서 올려 놓은 글도 본 적이 있다. 추천자는 아직 번역도 안된 책을 원서로 읽었다는 것인가? 18세기 법률서적을 영어원서로 읽는다고? 우리나라 법학자들 중에 "영국법주해"를 제대로 읽어나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려나?

아무튼 유식한 척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랜 전통인가 아니면 동서를 막론한 식자들의 보편적 허세인가.


본격적으로 이 책에 대한 후기를 쓴다.


우선, 역자의 번역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스럽다. 내가 읽어본 번역서 중 워스트 5에 꼽는다.

역자가 직접 번역한 것인지, 혹시 제자들한테 시켜서 자기 이름을 내세운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이 간다.

 

이 책의 번역본으로는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의 번역본도 있지만, 몇 년전 박홍규 교수의 "돈키호테 처럼 미쳐?"라는 책을 읽다가 같은 한국사람인데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미쳐버릴 뻔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애당초 선택할 생각도 안했으며, 더구나 지금은 절판되어 출간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났다.


원서의 내용이 사회학과 법학, 정치학 분야에 대한 소양이 상당히 필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용어의 선택을 보자면 ─ 역자에게는 죄송스럽지만 ─ 자는 이 분야에 대한 소양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전문용어가 아닌 일반적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그 적합성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문장이 상당히 많았다. 이렇다보니, 본문 자체를 물흐르듯 읽기가 어려워 책의 내용 파악과 의미 인식에 상당히 곤란을 겪었다.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를 번역하는 경우라면 아무리 불어가 자신의 전공외국어라 해도 책 내용이 속해 있는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번역에 대한 감수를 받고 출간하는 것이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면 "절도에 따른 살인"이라는 이상한 표현(p.189)은 "강도살인"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인용문의 원전인 P. Colquhoun의 "A treatise on the police of the Metropolis" p.65를 보면 "Murder,—with an intention to rob or steal the property of the person, or other property intrusted to his care."로 되어 있는데, 법리상 절도범행 도중 피해자에게 발각되어 피해자를 살해하면 강도살인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

p.200의 "형의 선고 및 그 근거는 만인에게 알려야 하겠지만, 그 반대로 형벌의 시행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는 문장도 번역감수를 거쳤다면 "형의 선고 및 그 이유는 공개되어야 하겠지만, 형벌은 비밀리에 집행되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이런 표현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법률용어 및 법학적 문장이기 때문이다.

P. 203의 "형벌의 목적은 최고의 존재인 신에게 결정을 맡겨야 할 범죄의 대가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범행을 방지하는 일이다(W. Blackstone, "As to the end, or final cause of human punishments. This is not by way of atonement or expiation for the crime committed; for that must be left to the just determination of the supreme being: but as a precaution against future offenses of the same kind.)"의 경우 "형벌의 목적은 범죄의 대가가 아니다"라는 번역은 어딘가 어색하다. 이 문장도 "형벌의 궁극적 목적은 범죄에 대한 ─ 신의 결정영역으로 남겨진 ─ 응보가 아니라, 장래 발생할 동종범죄의 예방에 있다" 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법학적 문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라면 똑똑한 사람들이니 관련분야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번역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학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역자에 국한된 비판이 아니다. 외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교수들이 번역했다는 문학작품의 경우 자질이 의심될 정도의 무성의한 번역이 상당히 많아서 대학교수들이 번역한 외국문학작품은 가급적 구매목록에서 제외한다. 오히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 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들의 번역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가 많다.

문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장도 제대로 못쓰면서 대학교수라는 권위를 내세워 저질번역으로 문학작품을 훼손하는 작태는 삼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둘째, 역자는 이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 같지 않다.

사학전공자가 쓴 고대그리스법제사라는 책에 대해 서울대 법대 최병조 교수가 용어선택과 법제사의 이해도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 대해서도 그러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역자는 해당분야에 대한 소양이 부족해 보일 뿐만 아니라 가독성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번역작업 완성후 주위 사람들에게 결과물을 읽어 보게는 했을까?

책의 내용을 역자 자신은 과연 이해한 것인지도 솔직히 의심스럽다. 다른 이들에게, 더구나 불특정 다수인들에게 타인의 생각을 번역해서 전달하고자 한다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수십번 문장을 가다듬고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통상적인 의미로 원활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신중을 기해야 함이 학자적 양심에 부합할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본격 학술논문도 아니다. 대학졸업 정도의 교양이 있는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문장 자체가 너무 좋지 않아 독서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고, 이로 인해 어쩌면 원저자가 말하고 하는 내용이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문단을 몇 개 꼽아 본다.

 

p. 151

처벌의 이러한 정치기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범죄의 극한적인 사례, 최대한의 것, 즉 가장 존중해야 할 형태의 법을 모두 위반하는 대역죄라는 것을 상정해보자. 그것은 매우 특이한 상황에서 완전히 비밀리에, 극히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모든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일회적이고 그와 같은 사건이 되풀이하여 일어날 리가 없는 행위가 된다. 아무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고, 아무도 그것을 본보기로 삼거나, 그러한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비난을 받을 수도 없다.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제도 안에서의 "범죄의 극단성"에 관한 우화는, 과거의 형벌제도 속에서 원죄가 차지하고 있던 의미, 즉 형벌의 근거가 나타나는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의미와 같다.

 

위 문단의 전반부는 "(경제적 합리성을 형벌의 척도로 삼는) 처벌의 정치기술론을 이해하기 위해, 법질서에 대한 최악의 범죄로 대역죄를 상정해 보자. (이 논리에 따르면) 이 은밀한 범죄는 결국 일회성이므로 모방가능성이 없고, 재범의 우려도 없으며, 휘발성이므로 비난받을 수 있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대충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후반부 문장을 분석해보자면 "새로운 제도안에서의 범죄의 극단성에 관한 우화의 의미 = 과거 형벌제도 속에서 원죄가 차지하고 있던 의미 = 형벌의 근거가 나타나는 순수형식으로서의 의미"라는 것인데, 내 생각에는 중간에 뭔가 빠진 문장이 있는 것 같고, 글의 흐름을 유추해 보았을 때 "범죄의 극단성에 관한 우화"가 아니라 "범죄의 처벌에 관한 극단적 우화"가 아닐까 싶다.

"과거형벌제도 속에서 원죄가 차지하고 있던 의미"와 "형벌의 근거가 나타나는 순수형식으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앞 부분에서 놓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쨋든 위와 같은 식의 불완전한 문장 조합으로 의심되는 문단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또 다른 문단을 보자.


p. 206

철저한 시간표에 의한 품행교육, 좋은 습관 들이기, 신체의 구속은 모두 벌을 받는 자와 벌하는 자 사이의 극히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관계는 공개적 형벌의 의미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 차원의 관계이다. 왜냐면, 이 관계는 공개적 형벌을 적극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문장 역시 몇 번을 읽어 보아도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Alan Sheridan 영역본을 다운받아서 해당부분을 찾아 보았다.


Alan Sheridan 옮김, p. 129

The training of behaviour by a full time-table, the acquisition of habits, the constraints of the body imply a very special relation between the individual who is punished and the individual who punishes him. It is a relation that not only renders the dimension of the spectacle useless: it excludes it.

시간표에 따른 행동훈련, 습관들이기, 신체 통제는 형벌집행자와 피집행자 사이의 매우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 양자의 관계는 대중의 구경거리로 벌이는 형벌집행을 단순히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배제시킨다.


한국어 번역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점을 영역본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라는 부사어 하나가 빠지면 의미전달이 달라진다. 이러한 유사사례의 문장이 상당히 많았고, 뿐만 아니라 당췌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10번을 읽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장도 너무 많았다.


셋째, 미셀 푸코는 뛰어난 사상가 내지 학자일지는 몰라도 글을 잘 쓰는 문장가는 결코 아닌 것 같다. 번역자 역시 역자서문에서 "푸코 특유의 '난삽한 어법' 때문에 번역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푸코의 난삽한 어법이라기 보다는 푸코의 언어기호체계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분석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저자 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짜증난 것은 문장 구성방식이었다. 어떤 주제에 대한 문단을 읽다 보면 이 문단이 어떤 이(예를 들자면 Beccaria)의 글을 단순 인용해서 끼워 넣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인용한 문장처럼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인용문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전반적인 문장이 이런 식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망망대해에서 홀로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몇 십페이지를 되돌아 가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거의 두달 가까이 이 책만 붙들고 읽었는데, 내 머리속에서 분출한 짜증이 18리터 생수통을 여러 개 채웠을 것이다.

 

넷째,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권력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감옥에 살고 있으며 감시와 피감시자 모두 권력의 감시하에 있다. 그리고 권력의 행사 형태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개인은 권력에 순종적인 개체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이 저자의 해석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비유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수긍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제시하는 여러 논증자료의 해석에 관해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양반은 뭐 이런 걸 이렇게까지 해석하는가 하는 감탄(?)마저 나오기도 했다(예를 들면 일람표 작성이나 학교에서의 시간표 작성 등도 권력행사의 한 양태라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실소가 나오기도 하고, '이 양반은 무정부주의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여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소리인지?' 하는 결론없는 물음에 계속 시달리다가 '나의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가'하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시험제도에 관해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p.300

시험이야말로 위계질서적인 감시와 규격화에 따른 처벌을 결합시키면서 배분과 분류, 힘과 시간의 양에 대한 최대한도의 이용,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자료축적, 적성에 대한 최적의 조립효과 등 주요한 중심적인 기능을 확보한다. 따라서 그것은 독방중심적이고 유기체적이며, 단계적이고 조립식인 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어렵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어색한 단어 조합으로 난해하게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시험은 개인에 대한 감시 기능과 규격화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일면 시험제도에 그러한 점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공동체생활을 영위하면서 살아간다"는 명제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감시기능과 규격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사회제도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법학, 철학, 사회학의 복합영역이라 할 수 있는 형사정책론 내지 형벌이론사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형벌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응보에서 범죄자의 개조로 변화했다는 내용, 형벌은 권력의 정치적 전술의 하나라는 점 등은 지금은 일반상식화 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푸코 이전에 활동하던 형법학자들도 많이 주장하던 내용이므로 온전히 푸코의 공헌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의 억압성에 관한 푸코의 날카로운 재해석은 곱씹어 볼만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활동, 특히 형벌의 집행, 또한 형벌에 관한 근대의 사상적 발전에 관한 기존 학계의 고찰을 완전히 뒤집은 것은 신선했다. 일반적으로 법학계에서는 근대 형벌은 이념의 역사적 발전에서 연원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푸코는 근대 형벌은 이념의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기술의 역할 변화로 해석한다.

하지만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데, 푸코는 이에 대한 논리적 비판은 생략해 버리고 자신의 해석만 제시한다. 논지의 전개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보니 견강부회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편협한 해석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인간의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 권력과 통제의 기술적 요소로 귀결된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 단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의문이 생겼다.

내가 푸코의 이론을 비판할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지성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푸코의 모든 이론이 그 누구도 반박불가한 진실 내지 진리일 수는 없으며, 내가 그의 광신도가 아닌 이상 그의 모든 것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말 그대로 "누구가 한 말이든 개소리는 개소리일 뿐"이니까. 

물론 미셀 푸코의 주장이 개소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일응 동의한다고 해서 그가 내세운 모든 논증과 해석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추종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번역판이 개정된다면 개정판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은 있지만, 너무 고생하면서 읽은 까닭에 이 책을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식자들은 위선의 탈을 벗어야 진정한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네도 권력의 혜택을 맛보고, 권력을 한껏 누리면서 마치 일반 피지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기사인양 위세 떠는 작태는 진정 역겹다. 이런 행태 역시 다른 형식의 권력행사이다.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말을 쏟아내면서, 또 일반인으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식자들 전용어쏟아내는 그 이면에 온갖 추잡한 행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 거리는 위선적인 식자들을 많이 보아 왔다. 진보니 보수니 따위와는 무관하다.

푸코가 어떤 사람이었지는 오로지 푸코 자신만 알겠지만, 그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난 식자가 아니니까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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